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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이천쌀의 새역사 만들기
2017/12/14 13:4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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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근사진(그린).jpg▲이천발전연구원장(전 경기도기획조정실장) 최형근
<이천쌀의 새역사 만들기/자채쌀 복원 프로젝트 첫번째>

경기도 대표민요인 사설방아타령을 들어보자.
“경기도라 여주 이천/ 물방아가 제일인데/
오곡백곡 잡곡 중에/ 자채벼만 찧어 보세/
에헤헤 에헤야 어라 우겨라 방아로구나”
이천하면 밥맛 좋은 쌀로 유명한데 그 기원은 자채쌀임을 알 수 있다.

자채쌀로 밥을 지으면 빛깔이 아주 희어서 마치 청백자처럼 푸른 기운마저 돌며, 기름지기 때문에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설사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이다.
자채쌀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1491년에 발간된 조선시대 농서(農書) 금양잡록(衿陽雜錄) 이다.
이후 산림경제(山林經濟, 1682), 고사신서(攷事新書, 1771),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1776) 등에 자채벼의 특성이 기록되었다.
이천 자채쌀이 얼마나 유명했던가는 1936년 2월 14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천은 자고로 자채벼로 유명한 곳이다.
전 조선적으로 보아 6월 유두(양력 8월 초)에 자채 햇쌀밥을 먹게 됨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거니와 특히 맛이 좋아 진상(進上)나락으로 이름이 퍽 높았다.
상지(常地)에서는 밥도 자채밥, 송편도 자채송편, 그런고로 각 지주들은 자채쌀로 계량(計量)을 하여 왔으나 농작(農作)에 품이 많이 들고 소출이 적은 관계로 작금에는 은방(銀坊), 곡량(穀量) 등 개량품으로 대타격을 받어 근자에는 미미하고 부진한 상태에 있다.
겨우 군내 조도(早稻) 작부면적 이천삼백반(反)에 연산고(年産高)가 일천삼백팔십석(石)이라 한다.

6, 7월 경에 경향(京鄕)에 수출되고 선물품으로 일본 내지까지 나가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유명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기사만 보아도 당시 한·중·일 삼국에서 자채쌀이 가장 밥맛이 좋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후 1977년 9월 2일 동아일보에 부발읍 가좌리 박치득씨가 자채벼를 삼백평 심어 다섯가마를 수확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어림잡아 육백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천 자채쌀은 어디서 온 것이며 어디로 갔을까.
이천쌀의 새역사를 만들기 위해 <자채쌀 복원 프로젝트>를 시리즈로 엮어 본다.
이천쌀프로젝트.jpg
<이천쌀의 새역사 만들기/ 자채쌀 복원 프로젝트 두번째>

자채쌀 기원을 역사이야기로 풀어보자.
조선태종 이방원의 장남이자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년)은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폐위되고 대월면 군량리로 귀양(1420년) 와서 18년을 살았다.

이때 양녕대군이 마을 앞 양화천을 건너기 쉽도록 징검다리(梁)를 놓았기 때문에 군량(君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대월면 군량리 · 장평리, 모가면 양평리 일대를 군들(君들)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에게 임금이 내린 땅, 곧 식읍(食邑)이다.
바다처럼 넓었다고 해서 지금도 헌바다(獻바다)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군들에 가면 진상뜰(進上뜰)이 있다.
자채쌀이 최초로 재배된 곳이다.
군량리가 자채방아마을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사(正史)에 보면 양녕대군은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행동이 지극히 문란해서 폐 세자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야사(野史)에서는 세종의 뛰어남에 스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이라 한다.
그가 이천에서 유배생활 중 썼다는 중국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초서체(草書體)로 쓴 작품이 있다.

이는 고금의 서예가들이 극찬할 만큼 빼어났다.
양녕대군이 문무를 겸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폐 세자 되고 유배되면 결국은 목숨을 빼앗아 정치적 분란을 막았다.
그러나 세종은 양녕대군에게 넓은 땅을 식읍으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 년에 한번 씩 불러들여 형제간의 우애를 나눈다.
세종의 변함없는 신뢰에 감복한 양녕대군은 조선에서 가장 밥맛 좋은 쌀을 가장 일찍 수확하여 세종에게 진상할 생각을 한다.
당시 일찍 수확할 수 있는 쌀은 중국 동북부3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 있었다.

그의 나이 15세(1409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경험을 살려 길림성에서 밥맛 좋은 볍씨를 찾아낸다.
양녕대군은 이를 가지고 와 이천지역에 맞게 개량하고 정성껏 길러 세종께 진상한다.
이 벼가 자채벼이고 일본 황실도 부러워했다는 자채쌀이다.

귀양은 사실상 단절이다.
세종과 직접 소통할 방법도 없었기에 햅쌀을 진상하고 세종이 이에 대한 답례를 하면서 형제간에 서로 소통하고 우애를 나눈다.
자채벼는 밥맛이 좋고 6월 유두(流頭, 양력 8월 초)에 수확되지만 수확량은 다른 벼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600여 년간 이천에서 재배되다가 일제 강점시대에 다수확 벼 품종이 들어오자 재배면적이 급격히 줄어들더니 1970년대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자채벼는 상생과 소통의 상징이요,
우애의 상징이고 신뢰의 상징이다.
이것이 이천의 시대정신으로 600년간을 전해 내려온 것이다.
자채쌀은 곧 이천의 문화이고 정신이다.
자채벼를 복원하는 것은 이천의 역사적 시대정신을 새롭게 살리는 것이다.
(양녕대군 이야기는 정사(正史) 조선왕조실록과 야사(野史) 김시양(金時讓, 1581~1643년)의 자해필담(紫海筆談)을 참고하였다.
아래 그림은 양녕대군이 쓴 후적벽부 초반. 자채벼가 어디로 갔는지는 세 번째 이야기에서 다룬다.)
이천쌀프로젝트1.jpg
<이천쌀의 새역사 만들기/ 자채쌀 복원 프로젝트 세번째>

니가타현(新潟県)은 일본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쌀 생산량은 많지만 밥맛은 최하위였다.
‘닭도 먹지 않는 쌀(鶏またぎ米)'로 유명했다.

나미가와(並河成資, 1897∼1937)는 동경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니가타현 농업시험장 주임으로 첫 발령을 받는다.
소명의식과 장인정신으로 니가타쌀의 밥맛을 개량하고자 밤낮으로 매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知人)으로부터 조선에서 생산된 햅쌀을 선물로 받는다.
먹어 보며 “바로 이거다”하며 무릎을 친다.

이천에서 생산된 자채쌀이었다.
즉시 자채쌀 종자를 들여와 적응시험을 한다.
자채벼는 일본벼와 다르게 키가 20∼30cm 커서 태풍에 쓰러지기 쉬웠다.
또한 다습한 일본 기후에 병 발생이 많았으며 일찍 수확할 수 있지만 수확량이 적었다.
우선 자채벼를 일본 기후와 토질에 적응할 수 있는 품종(森多早生)으로 만든다.
그리고 일본 대표품종과 교배를 시도한다.

북방계 자채벼와 남방계 일본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異種)이다.
이종교배(異種交配)의 성공은 육종학적으로 지극히 어려운 난제(難題) 이다.
수 없는 시행착오 후 당시 일본의 대표적 품종(陸羽 132号)과 교배에 성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1931년 일본 최초의 고품질 벼 품종인 농림1호(農林1号)가 탄생한다.
34살 젊은 나이로 나미가와는 일본 고품질 벼 품종의 원조(元祖)를 만든 것이다.
당시 일본은 쌀 자급이 안 되었다.
쌀 다수확은 국가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농림1호는 수량보다는 밥맛이 우선인 품종이다.
천재 농학자 나미가와는 니가타현에서 바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머나먼 효고현(兵庫)에 있는 밀(小麥) 연구소로 좌천된다.
좌천된지 7년 만에 수치심을 못 이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937년 그의 나의 41세였다.
니가타현 농업시험장에 현재 나미가와를 기리는 흉상(胸像)이 서 있다(아래 사진).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先覺者)의 비극이었다.
사후(死後) 후진 다까하시(高橋浩之、 1908∼1962년)가 나미가와 연구를 완성한다.
100여번의 시행착오 끝에 1956년 일본 고품질 쌀의 대명사 농림100호인 고시히카리(越光)가 탄생한다.
고시히카리를 통해 니가타현은 가장 밥맛 좋은 쌀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탈바꿈한다.
이후 新고시히까리 (越光 BL, 2000년), 이를 개량한 신노스케(新之助, 2015년)가 등장한다.

홋까이도(北海道)는 9월이면 눈이 오는 지역이다.
생육기간이 긴 고시히카리를 심을 수가 없다.
홋까이도 농업시험장에서 고시히카리를 8월 중에 수확할 수 있게 만든 품종이 1988년 등장한 기라라397(きらら397)이다.
무려 397번의 시행착오 끝에 성공했다.
이를 개량한 것이 2015년 유메피리카(夢ぴりか)이다.

현재 일본의 최고급 쌀은 신노스케(新之助)와 올벼 유메피리카(夢ぴりか)이다.
이천에서 자취를 감춘 자채벼가 일본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이제 자채쌀의 역사적 궤적이 밝혀진 만큼 자채쌀을 현대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그것이 이천의 역사적인 시대정신과 문화를 복원하는 것이다.
또한 가장 밥맛 좋은 쌀을 가장 일찍 수확하여 임금에게 바치는 정성으로 소비자에게 가까이 가야 한다.
이것이 이천쌀의 진정한 명성을 되찾는 길이 된다(終).
[ 민춘영 기자 mcy8839@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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